따끈따끈한 더 배트맨(The Batman, 2022) 리뷰와 잡담
🚨Spoiler Alert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타임이 176분, 세 시간이다. 시작한 지 20분 만에 "이걸 어떻게 두 시간 안에 풀지?" 라며 고민했는데, 분량을 늘리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풀지 못하고 120분 안에 모든 걸 넣을 생각을 하다니. 전 세계의 상업영화는 반성해야 한다. 규칙은 깨라고 있는 거다. 앞으로 개봉하는 영화는 OTT에 선공개하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사람은 영화관을 대절해서 보게 만들자.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지루한 영화라도 영화관에서 눈뽕을 당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영화와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모르는 상태로 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적잖이 당황스러운 분량이다. 인터미션이라도 주던가. 팬데믹 사이에 솔찬히 올라버린 영화 값을 생각하면 가성비 있다고 봐야 하나? 갑자기 이득을 본 기분이 든다. 앞으로 4시간짜리 영화에 인터미션을 주는 14000원짜리 영화가 자주 나오길 바란다. 한국영화 올리자! 한국영화 올리자!
리뷰에 앞서
코믹스를 보지 않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토드 필립스의 조커 등 근래 나온 리메이크 위주로 배트맨을 접했다. 따라서 해석이 상당히 다를 수 있고, 읽다 보면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더 배트맨은 집 앞 메가박스에서 봤다. 아이맥스? 너무 멀고 크다. 예전에 호빗을 아이맥스로 봤는데, B열2번이라 그런지 화면 위 대각선이 안 보이더라. 미리미리 예약 안하는 내 성격에 아이맥스는 무리다. 일반관에서 안분지족하겠다.
🚨지금부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 보고 오세요!
색, 뱉
까만 화면에 붉은 조명이 시선을 모은다. 레드는 검정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색. 어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초반에 나오는 독백에서 배트맨은 자신을 고담시의 어둠 그 자체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것이 빨강, 검정, 배트맨을 하나로 보이게 만든다. 색은 배트맨의 정체성과 관련되어있다. 배트맨이 갈등하는 대부분의 순간에는 빨강과 보색인 파랑이 항상 번갈아 나타난다. 영화 내내 배트맨은 고담시를 감싸고 있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파헤치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싸운다. 그리고 최후엔 강렬한 하나의 색으로 누가 이겼는지를 보여준다.
사운드와 리들러
그 중에서도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는 배트맨의 색과 마찬가지로 극 중의 또 다른 누군가를 상징한다. 천국의 계단이 아니다. 호수의 바위 위에서 성모상에게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달라 비는 소녀를 그린 음악인데 뜻을 알아버리니 잘 쓰인 시그널에서 그냥 누구 저격하는 노래로 급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스릴러에서 빌런의 어깨를 이만치 올려줬다는 점에서 잘 썼다고 생각한다.
라들런지 리들린지, 더 배트맨의 빌런은 사운드로 조져준다. 밤에는 킬러이자 인테리어 업자, 낮에는 유튜버로 바쁜 삶을 보내는 리들러는 직업 특성상 영화에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없다. 따라서 세 시간이라는 장황한 시간 속에 자신을 각인시킬 방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사운드와 수수께끼로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한 듯하다. 가는 곳마다 설계를 해 둔 탓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게 영화인가 보는 방탈출인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만큼 후반부 배트맨과 마주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울부짖는 장면은 BGM과 맞물려 머리를 울렸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미친 빌런. 조커가 현악기로 미친 모습을 표현했다면, 리들러는 관악기으로 했다는 차이 정도겠다. 약간 이상하지만 너무나 평범하게 생긴 아저씨. 배트맨과 같은 편인가?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드는 행동과 대사. 영화 내 비중을 더 늘렸으면 좋았겠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영화 제목이 바뀌지 않을까. 아주 조금은 아쉬웠다. 단편인줄 알았거든.
그리고 캣우먼
정말 도도하고, 독립적이며,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로 묘사된다. 그 모습이 캣우먼답다. 캣우먼이 아니라 호올-스 우먼이나, 플라멩고 우먼이었으면 못했을 역할이다. 배우도 배역에 너무 어울렸다. 영화로는 처음 만난 배역이다. 막판에 가까스로 깨달았다. 캣우먼한테 잠시 홀렸다. 가죽 슈트가 이렇게 섹시하게 보일 줄이야. 합격이오... 합격!
고든과 알프레드
그동안 만났던 고든은 부패한 경찰 중 유일하게 청렴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곧잘 묘사됐는데 조금 다르게 묘사되어 즐거웠다. 사실, 영화 내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분위기가 흐르는 통에 막판까지 의심했다. 알프레드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 혹성탈출의 시저를 연기하는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인지 초반에는 배우의 얼굴이 낯익어 집중하는데 애를 먹었다. 거기에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때보다 너무 정정해지셔서.. 본인이 배트 슈트 입어도 되겠다 싶었다. 든든한 조력자 역할은 충실히 해냈다.
펭귄과 팔코네
펭귄은 자기소개 안 해도 펭귄인지 알겠더라. 외모부터 합격이다. 나중에는 잘 모르는 사람 있을까 봐 몸소 뒤뚱거리기도 하시던데, 평소 이미지 속에 있던 펭귄맨 다운 무게감과 유쾌함이 느껴졌다. 팔코네는 팔코네가 맞을까 팔콘이 맞을까? 영화 내내 고민했다. 단순히 단서만 주는 조연 같으면서도 조연 같지 않은, 사건의 키를 가지고 있지만 자의가 아닌 누군가 소매 넣기 해서 가지고 있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게이트
내가 누구인지 아나?
배트맨이 같은 문 앞에서 두 번이나 뱉은 대사다. 처음엔 마스크를 쓴 사내로, 두 번째는 힉힉호무리 부잣집 아들로. 게이트 가드는 그 둘의 차이를 정확히 알려줬다. 마지막으로 그 문을 지날 때에 배트맨과 브루스는 한 몸으로 나타난다. 브루스와 배트맨에게 그 철문은 분리된 자아를 확인하는 거울이다.
거짓말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장 선거 기간에 현 시장이 살해당하고, 재개발과 변화를 외치는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지지만 고담의 진짜 시장, 주인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극 중의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진실과 관련되면 뚝배기 따인 시장 혹은 근사한 목걸이를 한 검사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죽기에. 진실을 말하고 죽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배트맨의 원칙에 따랐을 때 그러하다. 고담의 어두운 현실 반대편에는 배트맨의 정의로운 원칙이 있다. 고담시가 이에 따라 움직일 때, 배트맨은 밤이 아닌 낮에 모습을 드러낸다.
무슨 기분이 들었냐면
이 정도의 런타임이 앞으로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평균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 시장이 OTT 중심으로 짧아지고, 쉬워지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를 영화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경쟁자가 주지 못하는 베네핏을 줘야 한다. 그동안 국내 영화관이 좌석 교체, 오리지널 굿즈 발매 등 영화 외적 분야에서 시도한 차별화 전략 역시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는 영화라는 콘텐츠 그 자체에 더 힘을 심어줄 필요가 있겠다. 고전 영화 재개봉이라던지, 트릴로지 연속 상영 같이 조금 더 매니악하고 실험적인, 영화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상영 전 광고도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광고가 나와야 한다. 유튜브 범퍼애드같은거 말고. 이전에 메가박스가 싱어롱이나 시리즈 릴레이를 꽤 했던 기억이 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국내 영화관과 광고업계가 그러한 시도를 다시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14000원이 안 아깝다.